한글날, 변화 속에서 더 살아 있는 우리말
▲ 한글날 맞이 포스터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우리말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외래어와 유행어의 확산을 우려하며 순수한 우리말의 보존을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조금만 시선을 바꾸면, 외래어와 신조어의 등장은 오히려 한글의 힘과 유연성을 증명하는 현상으로 읽을 수 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만들며 “백성이 쉽게 익혀 날마다 쓰게 하려 한다”고 했다. 한글의 위대함은 바로 그 단순한 구조와 실용성에 있다. 발음과 문자 간의 대응이 명확하고, 음운 원리에 따라 어떤 소리든 적을 수 있는 체계이기에 한글은 언제나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다.
한글의 핵심은 단지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에 그치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 언어로 세상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한 민주적 언어 체계이다. 문자 사용의 평등성, 표현의 자유로움, 그리고 타 언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힘. 이 한글이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언어’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다.
우리가 쓰는 단어는 곧 우리가 사는 시대를 반영한다. ‘택배’, ‘플렉스’, ‘스세권’ 같은 단어들은 현대인의 생활 구조와 감수성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언어는 진화하며 문화를 기록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글을 “확장과 변용이 자유로운 문자”로 정의한다. 이는 한글이 고정된 규범이 아니라, 사회 변화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품어내는 유연한 문자임을 의미한다.
외래어와 신조어의 유입은 한글의 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한글이 여전히 열린 언어로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한글은 외래어를 침입자로 두지 않는다. 오히려 손님으로 맞이하고, 우리식의 맥락 안에서 다시 가공한다. 한글의 생명력은 이제 국경을 넘어 확장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통계에 따르면, K-팝·K-드라마 열풍으로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은 2023년 기준 약 200만 명을 넘어섰고, 한국어능력시험(TOPIK) 응시자 수는 10년 사이 3배 이상 증가했다.
또한 다문화가정의 증가에 따라 교육부는 2024년 기준 전국 약 17만 명의 다문화 학생을 대상으로 한국어 맞춤형 교육을 시행 중이다. 이는 한글이 더 이상 ‘한국만의 언어’가 아니라, 전 세계가 배우고 사용하는 소통의 언어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글의 ‘열린 구조’는 바로 이 글로벌 시대에 적합한 언어적 DNA다. 외래어를 수용하고, 외국인에게 익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문자 체계이기에, 한글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자기 정체성을 유지한다. 이제 한글날은 단순히 ‘우리말을 지키는 날’이 아니라, 한글의 정신을 계승하며 발전시킬 방법을 고민하는 날이어야 한다.
첫째, 교육에서 한글의 창제 정신을 강조해야 한다. 단순한 문법 학습을 넘어, ‘모든 이가 쉽게 배우고 소통할 수 있는 언어’라는 본질을 가르칠 때, 우리는 세종의 뜻을 오늘날의 언어환경에 맞게 이어갈 수 있다. 둘째, 외래어와 신조어를 무조건 배척하기보다, 한글 안에서 자연스럽게 조화시키는 시도가 필요하다. 국립국어원의 ‘표준 외래어 표기법’처럼, 현실적 사용과 언어 규범의 균형을 찾는 노력이 이어져야 한다. 셋째, 디지털 시대에 맞춘 한글의 창의적 확장도 중요하다. AI, 메타버스, SNS 등 새로운 플랫폼에서 한글이 유려하게 표현될 수 있도록 폰트, 언어 디자인, 번역 기술 등을 발전시켜야 한다.
결국 한글을 지킨다는 것은 살아 있게 두는 일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며 꿈꾼 것은, 누구나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을 표현할 수 있는 사회였다. 지금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정신을 현재에 맞게 확장하고, 한글이 미래 세대의 언어로도 숨 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오지우 기자
2025-10-11